[잭클잭] Although I've sinned a lot
written by 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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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theless, before you again.
ᅠ일 년의 대부분을 그럭저럭 유쾌하게 보낸 남자가 있다. 제법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가공해 글을 써 내려가는 남자. 사람들은 그를 기자 클리브라고 불렀다.
ᅠ클리브의 최근 운수는 꽤 좋았다. 불과 한두 달 전의 추수감사절엔 옆집 마리에게 초대받아 성대한 음식을 대접받았고, 할로윈인 오늘 밤엔 다른 이웃들과 함께 근처 공원에서 바비큐 파티도 하기로 했다. 클리브의 입장에선 지갑이 덜 얇아지는 일이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다 이번 달 원고료엔 보너스까지 붙었다.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살포시 웃다 못해 포옹까지 하는 달이었으니, 그가 큰맘 먹고 미뤄뒀던 집 안 재고라도 보충하는 게 어떨까 고민하는 모습도 그저 평범한 소시민처럼 보일 뿐이었다.
ᅠ"이거…… 필요한 게 생각보다 많은데?"
ᅠ부러진 펜촉, 뚜껑 닫는 걸 깜빡해 다 말라붙은 잉크, 색이 바랜 넥타이나 구멍이 제대로 난 양말…… 등등. 귀찮아서 미뤄뒀던 게 한둘이 아니다 보니 당장 사야 할 것만 해도 생각보다 많았다. 이 중에서도 제일 급한 건 어젯밤 잃어버린 만년필로, 몇 년이나 잘 아껴가며 쓴 만년필을 잃어버린 사실을 깨달았을 땐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더란다. 어휴, 기억도 깜빡하더니 이젠 물건도 깜빡하지……. 다른 이가 들었을 땐 어딘가 조금 이상한 -그러나 본인은 아무 자각 없는- 푸념을 해대며 전보다 훨씬 두툼해진 지갑을 코트 안주머니에 잘 챙겨 해가 져가는 거리로 나온 클리브는 여태껏 이 거리에 살았으면서도 정작 몇 번 발을 들인 적 없는 대형 마트가 자리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ᅠ……이상한데, 누가 지켜보는 것 같기도 하고……?
ᅠ클리브가 이상함을 느끼는 건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눈앞에 대형 마트가 나타난 순간 그는 찰나의 감각을 일단 저편으로 밀어놓고 무엇을 사갈지 맹렬히 고민하며 마트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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ᅠ"……내가, 왜 저기에 있지?"
ᅠ그다지 집요하지는 않지만 클리브가 이상함을 느꼈던 그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쫓는 남자의 모습은 실로 기괴했다. 이목구비는 그림자가 짙게 져 알아보기 어려웠고 체격이 꽤 건장했으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지는 듯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런 남자를 거리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ᅠ마치, 자신들은 인지할 수 없다는 듯이.
ᅠ남자는 이따금 사람들이 곁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놀란 듯 몸을 움츠리거나 벽 쪽으로 피하다, 그들이 자신을 인지하지도 접촉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겨우 깨닫고는 종래엔 거리 한쪽에 오롯이 선 채 클리브가 바깥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알아봐야 해, 저 사람이 누구인지. 왜 나는 저 사람 안에 갇혀 있는지…….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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ᅠ"히야, 마침 세일 기간이라니…… 행운의 여신이시여, 이대로 곁에만 있어 주세요! 하하!"
ᅠ한참 후,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나온 클리브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는 거리를 걸었다. 호박을 닮은 주황색의 커다란 등불로 장식된 길가엔 어느새 온갖 분장을 마친 뒤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가득하고, 사탕 봉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누군가의 손 사이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심지어 어느 집의 정원에선 벌써 무언가를 굽는 듯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러다 약속에 늦겠는걸. 발걸음을 재촉해 뛰다시피 현관 앞에 도착한 그가 숨을 고르며 열쇠를 꺼내 들었을 때, 그의 뒤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ᅠ"응?"
ᅠ뒤를 홱 돌아본 클리브는 아무도 없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청을 들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는 마저 낑낑대며 문을 여는 것에 집중했고, 곧 현관 앞은 조용해졌다.
ᅠ"……."
ᅠ나무 뒤로 몸을 숨겼던, 아마도 소리의 주인일 남자는 닫힌 현관문을 조용히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에 얼핏 드러난 눈가엔 음울한 체념과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얕게 드리워져 있었다.
ᅠ무작정 그를 기다렸고, 집 앞까지 따라왔다. 그동안 자신이 알아낼 수 있던 것은 그의 이름과 기자라는 신분 -집으로 오는 동안 마주치던 이들이 하나같이 그를 기자라거나 클리브 씨라 불렀으므로- 그리고 클리브의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의 기척은 바깥에 있는 자신만큼이나 흐리다는 것이었다.
ᅠ……이 모든 것이, 남자는 달갑지 않았다.
ᅠ한때 본래의 이름을 잃고 잭 더 리퍼라 불렸던 자는 자신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던 것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살인마, 모두의 합작품, 평범했기에 그 어떤 모습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던 변신 능력자……. 아마 나는 지옥에 가겠지. 그건 자신을 오래 가두었던 단단한 철창 안에서 그가 생각했던 끝이었다. 좋은 기억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분노와 증오만 남은 자신이 갈 곳은 그 외엔 어디에도 없다고. 당시 재판의 결과만큼이나 뒤바뀌지 않을 미래라고 체념한 채로 생각했던 마지막이었는데. 어째서 자신은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걸까.
ᅠ달칵.
ᅠ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생각을 멈췄다. 느긋한 걸음으로 나오는 이는 클리브였으나…… 동시에 클리브가 아니었다.
ᅠ"할로윈엔 죽은 자들이 온다고 하지. 반가운 이가 왔어."
ᅠ익숙한 목소리로, 정말로 반갑다는 듯 말하며 낮게 웃는 이의 눈가는 옅은 붉은 빛이 감돌았다. ……저건, 자신이다. 알아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뚜렷해진 기척이 그의 감각을 쿡쿡 찔러왔다.
ᅠ"너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ᅠ"말하자면 길어. 지금 너와 내가 마주 보고 있는 이유를 파헤치는 데 걸릴 시간만큼이나."
ᅠ"……."
ᅠ"하지만 궁금한 것 같으니 간단히 줄여보자면, '나'는 감옥에서 죽었었지. 그러나 강화인간으로 깨어났고, 다시 버려졌어. 그게 나야. 곰인형 따위에 갇혀 있던 나를 꺼낸 건…… 지금 네가 마주하고 있는 몸의 주인, 클리브 스테플이고."
ᅠ혼란스러운 모양이군. 반응을 보니 내 앞에 있는 너는 감옥에서 죽은 '나'야, 그렇지? 정말 그리운 시절인걸……. '잭'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근황 따위가 궁금해서 죽은 자들의 날에 찾아온 건 아닐 테고, 그래.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인사라도 하러 온 건가?
ᅠ"……내가 어째서 너와 마주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우연이라고 하기엔 애매해. 죽은 이후의 첫 기억은 그 클리브라는 자를 마주한 것이고, 명확한 목적이 있던 것도 아니니까. 다만, 존재할 리 없는 내 기척이 그에게서 느껴지던 게 궁금했던 것 같군……. 그래, 그랬던 것 같아……."
ᅠ"글쎄. 우연일지 아닐지는 나 역시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한 때를 마주할 수 있어서 기쁘군. 내가 아직 인간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누군가를 죽일 때 말고도 존재한다는 게…… 나를 살게 해, 더는 공허하지 않도록."
ᅠ"그 말은, 지금의 네가 여전히 살인마로서 지냄에도 지루하지 않다는 뜻인가?"
ᅠ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는 듯 잔뜩 의문에 찬 그의 물음에 '잭'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웠다.
ᅠ"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이제 과거의 망령으로 살지 않아. 진실을 알아야 하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몸의 주인과 공존하는 법을 배웠고…… 이것 봐. 보란 듯이 머물러 있잖아."
ᅠ"……어떻게 그런."
ᅠ"왜 그런 표정이지? 내가 나름 정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달갑지 않나?"
ᅠ"이해할 수가 없어."
ᅠ"그럴 테지. 그건 망령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거든."
ᅠ그러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해. 네 안식은 이곳에선 결코 주어지지 않을 거야.
ᅠ망연한 얼굴을 한 채 아주 느리게 흩어지던 잔상을 끝까지 눈에 담던 잭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흠, 약속에 늦지는 않겠군. 이만 클리브에게 넘겨줘도 되겠어. 그래, 클리브? 죽은 자를 마주한 소감이 어때……. 아, 이미 두 번 죽은 자와 함께 하고 있어서 별 감흥이 없나?
ᅠ돌아오는 클리브의 대답은 바깥으로 들리지 않았으나, 짙은 웃음을 허공에 남겨둔 채 내면으로 사라진 잭의 마지막 말만은 또렷이 들렸다.
ᅠ아무렴 어때. 나는 죄를 많이 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곁에 있는 것을.
잭클잭이라고 썼는데 실상은 클리브의 일상 반, 잭과 잭의 대화 반……. 망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클리브 미안해!